폰

※ 스포일러 있음

 

 

 초등학생 때 TV에서 해줬던 공포영화를 혼자 본 적 있다. 집에 들어온 엄마가 넌 왜 저런 걸 혼자 보냐고 뭐라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봤던 영화가 이번에 재개봉한 <폰>이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거리두기 4단계로 격상되어 앞서 재개봉한 <기담>과 <장화홍련>은 포기하고 있다가 너무너무 답답하고, 더 많은 한국 공포영화의 재개봉을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다.

 

 어릴때라 내용은 기억 안 나고 에드거 엘런 포의 <검은 고양이>처럼, 벽에 시체를 묻어둔 장면만 강렬하게 기억나는 영화였는데 다시 보니 왜 기억을 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슬픈 영화였다. (어릴 땐... 서사를 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이해를 못했겠지...?)

 

 기자인 지원은 미성년자와 원조교제를 하던 사람들을 폭로한뒤, 위협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친구 가족이 미리 사둔 집에 머물게 된다. 난 지원이 쓴 원조교제 기사가 그저 핸드폰 번호를 바꾸게 하기 위함이라고만 추측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감독이 하나하나 허투루 설정하지 않았단 것을 알게 되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미성년자와 불륜한 남성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게 된 것이다...ㅠ

 

 지원에게 은신할 공간을 제공해준 친구 호정의 남편, 장훈이 이 사달 나게 한 장본인이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 가정에 충실한 척하는 놈인데 뒤에서는 멋모르는 고등학생과 만나고, 종국에는 임신까지 시킨다. 사건이 드러날수록 한숨이 터져 나오고 막판에는 눈물이 줄줄 났다. 가정 있는 놈이 거절도 안 하고 받아준 게 제일 잘못이지만 그 늙탱이 남자 뭐에 홀렸기에 미신까지 믿으면서 사랑 고백을 하고, 죽어서도 아내를 질투한 걸까...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지도 않는 그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쓰면 쓸수록 그런 남자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 게 안타깝다.

 

 무서웠던 건 죽은줄 알았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도,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 벨소리도 아니었다. 늙은 남자들이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성들을 만나는 현상이 이 영화 개봉하고 1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그게 문제인지도 모르는 사회가 난 너무 무서웠다. 이 영화를 본 당일에도 충격적인 기사가 떴었는데... 날이 갈수록 나이차가 좁혀지는 게 아니고 더 심해지고 있다. 그들을 전혀 고칠 생각이 없는 게 너무 끔찍하다.

 

 영화 속 남자는 기혼인 상태라 자신들과는 다른 문제라 생각을 했던 걸까? 기혼이면 더 큰 문제가 맞기야 하지만 혼인 유무를 떠나서 제대로 정신이 박혀있다면 제 또래를 만나야 하는게 맞지 않나 싶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았으면 금전적 보상을 하던지 다른 방법을 제시하던지 책임을 져야지 연락을 씹고 그만 만나자고 회피하는 것까지 제정신이 아님을 증명한다. 문제는 이게... 정말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호정은 어렵게 낳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불륜 사실을 묵인하고, 몸싸움을 벌이다 죽인 고등학생을 지원이 묵고 있던 집 벽에 묻어버린다. 혼자 전기를 깔고 시공하는 모습이 정말 멋져보이기도 하면서 기괴했다. 그런 재능을 시체 숨기는 데에 쓰지 마시라고요ㅠㅠ... 이렇게 멋진 여잔데 남편이란 놈은 왜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모든게 까발려진 뒤에는 친구와 남편까지 죽이려 한다.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는 말이 와닿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편을 놓아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이'를 위해 모두를 없애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하나하나 따지면 모정이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 구구절절 한탄할 것 같은데 (보면서도 저렇게까지 한다고? 놀랍기는 했다.) 대역죄인을 죽이려 했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어 더 이상 말을 얹고 싶지 않다. 그래도 딱 하나만 말해보자면... 사회가 여성에게 주입한 모정인지 정말 본능적으로 나오는 모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난 저렇게까지 낳을 생각 없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이니셜 획수를 더해서 나온 숫자가 10이라면, 매시 10분에 ‘우리는 사랑할 운명이에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거야. 발신자 번호는 상대방의 번호 뒷자리로 바꿔주고. 그걸 꾸준히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전체적인 스토리 구성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장훈에게 향하는 진희(고등학생)의 진실된 마음이었다. 그를 위해 그가 좋아한다는 월광소나타도 친구에게 배우고, 그의 마음이 떴음을 느꼈을 때는 그 시절 감성의 미신까지 믿어가면서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 메시지는 진희가 죽은 뒤에도 계속 보내진다. 그 메시지로 인해 고통받는 장면이 오프닝에 나오는데 그냥 봤을 때는 뭐야? 싶었지만 다시 곱씹어보니 진희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껴져서 안타까웠다. 남이 볼 때는 징그럽고 끔찍한 사랑일지 몰라도 얼마나 사랑하면 저렇게 할까 싶어서 할 수만 있다면 장훈을 몇 대 쥐어박고 싶다.

 진희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은 문자만이 아니었다. 장훈의 딸 영주는 진희에게 빙의되어 가끔가다 제 나이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고 아빠에게 과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걸 간파한 지원은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호정과 장훈은 그저 그나이대에 나타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일뿐이라고 치부하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점점 진행되는 게 재밌었다. 진희의 사랑을 여러 갈래로 보여주며 공포를 심화시킨 점이 정말 좋았다.

 옛날 영화라 덜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완성도가 탄탄하여 다른 사람들도 꼭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도 왜 다른 영화도 아닌 <폰>이 재개봉 했을까? 왜 수작이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궁금했는데 어릴 적엔 보이지 않았던 요소들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영화관 가서 보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