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 스포일러 있음

 

 

 친구가 잔인한 거 얼마나 나오는지 먼저 봐달라고 해서 보게 된 영화였다. 욕실에서 부부를 살해하고 벽 한쪽에 '怒(성낼 노)'라고 적고 간 살인범을 잡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포스터와 시놉시스만 보고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 초반에도 범인을 잡는 경찰의 포커스로 영화가 진행될 것 같아 벌써부터 지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수사에 집중하기보단 미스테리하게 나타난 용의자 세명의 이야기를 각각 풀어내어 범인이 누구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중반까지 루즈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더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범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영화 자체가 용의자들을 의심하게끔 만드는데 오해가 풀린 뒤에는 주변 인물들처럼 나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으면서 보는 것도 재밌지만 너무 그것에 치중하면 영화가 좀 루즈하게 느껴져서 범인을 생각하되, 인물들 간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보는 게 더 재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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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가출한 3개월 사이에 이 동네에 훌쩍 나타났어."

"벌써 두 달 됐나? 신원을 알 수 없다는 게 영 불안하긴 해."

 

 영화 자체가 살인 사건 범인을 잡는 이야기다보니 ‘믿음’에서 ‘의심’으로 가는 순간 모든 관계가 깨져버린다. 세 용의자마다 깨지는 형태가 달라지는데 아이코와 타시로는 타시로를 믿지 못하는 주변 인물들로 인해 같이 의심으로 물든 경우다.

 

 아무리 사랑하고 믿어도 자신이 더 오래 봐왔던 인물보단 아니다. 그게 부모라면 더더욱 그렇다. 부모님이 반대하면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 같아도 의심을 해볼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조심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타시로의 대처는 이상했다. 제 사정이 있어서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은 알겠지만 자신이 아니면 조금은 당당해도 되지 않나? 그렇게 해명않고 떠나버리면 어쩌란 건지 모르겠다. 타시로만 해명 않고 떠난 건 아닌데 이 친구는 매번 도망치는 인생이기 때문에 아이코를 그렇게까지 사랑한 건 아닌가? 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코는 안그래도 상처가 가득한 타시로를 살인범으로 오해했다는 사실에 매 순간 죄책감을 안고 살 것이다. 안 그래도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고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인데 둘을 이대로 사랑하게 놔둬도 되는 것인가 싶다… 아이코 아버지의 도움으로 가족의 빚을 갚을 순 있게 됐겠지만 그 뒤에도 힘들면 도피하는 게 습관이 되진 않을는지… 걱정이 앞선다.

 

 

"혼자 싸 안고 고민하지 마, 너는 잘 해왔어. 혼자 몇 년 동안 잘 싸워왔어."

"나 이번엔 진짜 너를 지켜줄 거야"

 

 그래도 절벽 끝에서 만나게 된 둘이니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은 서로뿐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 테니... 잘 살라고 응원해줘야 맞는 거겠...지? 실례를 넘어선 오해를 했음에도 (사실 나도 타시로가 찐 범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첫 장면부터 제일 음침했고 속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타시로의 비밀은 다 아이코의 입에서 나온다. 제 입으로도 아이코에 앞에선 다 말하게 된다는 뉘앙스로 말하기도 했고.. 아직도 찜찜하지만 아이코를 사랑하긴 했나 보다~) 다시 돌아와 준 타시로를 기특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둘이 잘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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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겐 아무리 설명해봤자 전달되지도 않아.”

 

“근본적인 차원에서 나를 배신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네가 어떻게 대답을 하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건 결국 내 문제이긴 해.”

 

유마와 나오토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말하지 않는 나오토로인해 신뢰가 깨져버린다. 사실 알고 있는 게 이름과 나이, 핸드폰 번호 정도밖에 없는데 해명할 시간을 줘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유마의 입장에서 굉장히 답답했을 것이다. 자신의 나이조차 말하기 싫어했던 나오토가 유마의 어머니를 간병해준 것을 보면 마음을 연 것은 분명한데 아무리 자신의 병이 있다고 한들 오해한 채로 끝나면 슬프지 않나? 왜 그렇게 입을 꾹 닫고 있는지 지금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유마의 오해가 화가 날만한 것도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유마가 나오토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구직중이라고 말한 것에 비해 입에 풀칠하며 살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긴자에 있었으면서 없다고 뻔뻔하게 모른 척한 것도 이상하다. 누가 봐도 오해할만한 상황을 계속해서 나오토가 제공하고 있었지만 당사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치료 불가능한 병을 안고 있다. 그래서 구직을 할 필요가 없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다. 뭐 이런 말을 해주면 유마도 의심을 풀 것이다. 유마는 나오토가 뭐라고 변명을 하던 그냥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뭐가 그렇게 나오토의 마음을 닫게 만든 걸까? 지켜만 봐야 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안타깝고 슬펐다.ㅜ

 

 

“그날 경찰한테 연락 와서 들었는데 공원 풀숲에 쓰러져 있었대요 정말 나오토답죠”

 

“묘지에서 본 바다 정말 아름다웠어. 거기에 묻힌다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같은 무덤은 아니어도 옆자리면 좋겠어”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사라진 나오토는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나오토가 사라진 뒤에야 나오토에 대해 알게 된 유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이 곧 죽을 사람이라 받아들여주지 않을 거라 판단했던 걸까? 유마를 사랑하기에 배신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곧 죽을 목숨이라면 한 번쯤은 부딪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그렇게 실행력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라면 진실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내가 아파서 아프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나오토는 조금 더 당당해져도 괜찮았다. 이미 끝나버렸지만… 에피소드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미련이 철철 남는다..ㅠ

 

제일 좋았던 장면은 역시 무덤에 관해 말하던 장면이다. 자신의 가족 무덤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장난식으로 툭 던진 말에 진심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근처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나오토… 첫만남이 좋지 않아 이렇게 깊은 사랑으로 번지는 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남자끼리라 그런 건지 뭔지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들의 감정에 집중하여 깊은 사랑을 나누는게 멋지고 부러웠다. 나도 죽어서까지 평생 옆자리에 두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가족에게도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데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에게 그런 애정이 생긴다는 게 신기하고 로맨틱하다. 끝은 비극이었지만 둘의 절절한 사랑에 가슴이 떨렸다. 역시 로맨스가 최고야... 그 후 나오토의 시신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무덤 옆으로 옮기게 된다면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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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한다고 뭐가 바뀌겠냐고, 아무리 울고 화를 내 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신고하고 알려도 아무 소용없어! 더 억울하기만 하지!”

 

 앞선 두 용의자의 이야기가 로맨스에서 의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진짜 범인인 타나카의 스토리에는 로맨스도 의심도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로맨스의 기미가 있기야 하지만 타나카의 이야기도 아니었거니와 이어지지도 않는다. 아무도 없는 섬에 혼자 들어와 있단 점부터 수상한데 이즈미는 타나카를 자주 찾아가 챙겨준다. 그 모습에 이즈미가 타나카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가 불안함이 생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 마음속 의심도 함께 사라졌다. 

 

 이즈미가 나하에서 일을 당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도와주지 못한 타츠야는 뒤늦게 신고를 하려 하지만 무력함을 느낀 이즈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고 정말 굳게 입을 다문다. 타나카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상하지만 그냥 떠돌이 인생을 즐기는 멋진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으로 향할수록 용의자를 닮았단 생각도 많이 안 들고 특징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머리도 길었기에 그 사이에 어떻게 저 길이까지 머리를 기를 수 있나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 이즈미의 일을 말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속으론 이즈미를 모욕하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긴 한데 이래서 면식범이 생겨나는 거구나 느꼈다. 속은 모르지만 겉으로 나에게 친절하고 착해 보이는 이 사람이 대체 어떻게 나에게 그런 흉폭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할까? 과하게 친절하고 착한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그냥 착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나쁜 사람들 때문에 더 의심을 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이즈미가 더 상처받지 않도록 타츠야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체포된 것이었다. 타나카는 자신의 속마음을 글로 적어두는 버릇이 있었다. 이즈미의 일도 당연히 적었다. 그걸 본 타츠야가 섬에 올지 모르는 이즈미를 위해 돌로 다 긁어내어 보지 못하도록 막는다. 약자를 조롱하기 좋아하는 우리네 사회에서 타츠야같이 입 무겁고 의리 있는(타츠야가 겁 많아서 벌어진 일이다만...)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하고 있나?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무의식에 말한 것도 있을 테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지키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타츠야는 이즈미를 사랑했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리뷰는 제목에 관한 분석도 한 것 같은데 생각이 짧은 나는 거기까진 못하겠다. 사회적 분석 같은 거 잘 못한다. 그냥 강약약강이 심한, 자칭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있다 여기는 범인이 화풀이를 하고 싶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 밖엔... 자신이 일을 벌이고 살아나길 기다렸다는 것도 토 나오고 한심했다.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 남자를 사회의 부조리에 비교하여(?)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틀이지만 영화 자체는 재밌었으니...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이런 종류의 영화 잘 보지 않는데 여기서 가슴 찌르르한 로맨스도 느끼고, 생각할 것도 많아서 (내가 말로 표현 못하는 게 슬프다만...) 좋았다. 원작은 책이라던데 거기는 감정선이 더 잘 담겨있을 것 같다. 나중에 읽어봐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