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코멧

※ 스포일러 있음

 

 

 무대에 객석이 존재하고, 무대가 예쁘다고 하여 한 번은 봐야겠다고 생각한 공연이었다. <전쟁과 평화>를 읽지 않아서 시놉시스만 읽었을 때는 지루한 불륜극이겠구나 싶어서 예매를 하기 전까지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왠지 안 보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보러 가게 되었다.

 이 공연은 공연시작 5분 전부터 배우들이 객석과 무대를 돌아다니는 ‘프리쇼’를 진행한다. 이 공연을 두 번 봤는데 처음 봤을 때는 상수 앞쪽에 앉아 있어서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과 이따금 눈이 마주쳐 부담스러웠다. 가끔가다 박수 유도도 하는데 치지 않으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가까워서 낯을 가리는 사람이면 앞쪽에 앉으면 안 될 것 같았다. ^^; 난 너무 힘들었다. 다시 프리쇼도 돌아와서 내가 앉았던 자리에는 앙상블들과 아나톨 역의 배우가 처음에 왔었는데 그 뒤로는 아나톨이 절대 그쪽으로 오지 않아서 슬펐다. 무대와 동선이 궁금하여 온 것은 맞으나, 아나톨 배우 중심으로 예매를 했었기 때문에... 그래도 공연 보는데 엄청난 불편함은 없었어서 괜찮았다. 아나톨이 거울 보는 장면도 잘 보였으니까 괜찮다고 속으로 위안해본다...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시놉시스가 전체적인 틀은 맞는데 내용에 집중할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 많고 다 보고 난 후에는 시놉시스가 중요한게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놉시스만 보고 재미없다고 예매를 하지 않았으면 정말 땅 치고 후회할 정도로 내 마음에 쏙 드는 공연이었다. 처음에는 난 대체 뭘 보러 온 것이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혼란스러웠는데 생각이란 것을 포기하고 공연에 내 몸을 맡기니 너무 즐거웠다. 그 생각을 할 쯤에는 1막이 끝나 있어서 앞에 놓친 내용들이 다시 보고 싶어 재예매를 했을 정도니...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극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겠으면서도 한 번 보고 판단하면 좋을 극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은 이미 끝났지만 말이다ㅎㅎ

 극장도 그렇고 시대적인 배경도 그렇고 되게 클래식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나톨이 나오는 넘버마다 현대적인 edm 요소가 가미된다. 개인적으로 일렉트로닉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에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클럽씬에서 나오는 led 잔과 머리띠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눈 아픈건 고사하고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싶었다.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나톨이 정말 노는 것에 진심이구나를 표현한 것 같아 이해가 됐다. 아나톨 너란 남자는 정말...^^ 나쁜 놈이야...

 정말 나쁜 남자이긴 하지만 아나톨 등장 씬에서 마음이 떨리는 나는 대체 뭘까? 사람들이 <관상>에서 수양대군 등장 씬이 정말 멋있었다며 입을 모아 칭찬할 때도 심드렁했던 나였는데 ‘진짜 엄청 잘생긴 남자 등. 장.’이라는 가사와 함께 등장하는 헛웃음 나오는 장면에서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마라탕이나 매운 떡볶이, 불닭볶음면이 자극적인 것을 알지만 끊을 수 없는 사람들처럼 아나톨이 나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더 보고 싶었다. 안드레이의 묘사가 크게 없어서 모르겠지만, 잘생기고 핫한 남자가 내가 약혼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가온다면 만나진 않아도 그 반응을 즐길 것 같기는 하다... 물론 초반 장면만 생각했을 때 그랬다는 거지 후반으로 갈수록 얘는 정말 아니구나 싶었다.

 피에르의 돈을 받고 나타샤를 떠난 아나톨은 정말 나타샤를 사랑한 걸까? 그 당시에 결혼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 결혼을 마음먹은 것을 보면 사랑은 맞는 것 같은데, 그 사랑의 기준이 남들에 비해 너무나 얕기 때문에 돈보다 우선순위가 낮아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내 애인의 가족이 나에게 몇 천, 몇 억을 주면 나도 그런 선택을 할 것 같다는 느낌...?ㅎㅎ 아무리 절절한 사랑을 했다고 해도 그런 돈을 쉽게 벌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난 임자 있는 사람을 건들지도 않고, 결혼을 약속하지도 않으니 경우가 다르지만 말이다.

 내용을 따라가지 않고 봐서 더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피에르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피에르는 초반에 아나톨과 나타샤를 도와준다. 사랑의 도피를 하겠다고 말을 했을 때도 돈을 줬던 남자가 마리아 대모의 말 한마디에 놀라며 태세 전환을 하는 게 참... 집안끼리 엮여있다거나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탈리가 안드레이와 약혼했단 사실도, 아나톨이 나탈리를 데려가려 하는 것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고 행동을 바꿨을까? 처음 듣는 척해야 자신에게 피해가 없으니까 그 부분은 이해하지만 그 당시에는 저놈은 대체 뭔가 싶었다. 피에르의 마지막 독백에서도 대체 쟤는 왜 저러는 걸까 당황스러워 루즈했다. 내용이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으니 노래를 듣기보단 무대 구경을 했는데 가득 채워진 포그와 혜성처럼 빙빙 도는 조명이 정말 예뻤다. 갑자기 왜 이런 게 나오나 싶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피에르의 서사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그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ㅎㅎ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피에르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망하고 공허한 사람 그 자체여서 계속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정확한 건 아님)

 혜성 조명 얘기가 나와서 조명 얘기를 더해보자면 당황스러운 클럽씬 빼고는 전부 예뻤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 남는 것은 소냐가 나타샤를 타이르고 독백할 때 흰 드레스에 염색하듯 번지던 조명이었다. 의도한 것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흰 옷에 그렇게 비추니 소냐의 감정이 더 잘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초반에는 주황빛이었고 노래 시작할 때는 시안 느낌이었는데 둘 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타샤가 소냐와 있을 때였나 돌아다닐 때마다 바닥에 있는 led 조명이 나타샤가 돌아다는 동선을 따라 같이 움직이는데 그것도 너무 귀엽고 예뻤다. 내가 이해하지 못 한 피에르의 마지막 독백 씬이 중요한 장면이고 큰 틀인 것 같은데 그걸 위주로 혜성처럼 따라다니는 조명들이 많았던 것 같다.

 무대는 예쁘다고 하기에 화려하고 디테일이 엄청난 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그런 것은 아니어서 뭐라 말하기 그렇다. 현대 미술도 이해 못하는 내가 이런 것에 무언가 느끼기란... 너무 어려웠다. 약간 경사가 져있어서 객석 쪽으로 올 수록 밑으로 내려와 있는 구조여서 잘 보이는 게 맘에 들었다. 근데 맨 뒤쪽 센터는 또 안보였다. 두 번 본 결과 사이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려지는 구조 같은데 어디 앉느냐에 따라 가려지는 게 달라져서 내가 무엇을, 누구를 보러 가느냐에 따라 좌석 선택이 엄청 달라진다. 센터는 정말 잘 보여서 좋았다... 역시 센터가 최고야... 코멧석은 부담스러워서 생각도 안 해봤는데 낯가리고 배우를 보러 가는 게 아닌 나로선 무대석 센터가 제일 좋았다. 무대가 전체적으로 잘 보이고 배우들도 잘 지나다니고 완벽한 자리였다.

 제일 좋았던 넘버는 Charming이다. 아나톨의 누나이자 피에르의 아내인 엘렌이 아나톨의 부탁으로 나타샤를 무도회에 초대하기 위해 찾아가 부르는 노래인데 멜로디도 좋고 번역도 좋았다. 엘렌이 뱀 같았다. 나타샤에게 다가가 몸 전체를 감싸는 느낌? 나쁜 뜻이 아니라 그만큼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다 보고 나서도 다시 듣고 싶었는데 기억나는 게 샤롯데 밖에 없어서 유튜브에서 짧게 짧게 나오는 노래들 하나하나 들어보고 넘버 이름을 알게 되었다. 샤롯데는 샤망테(Charmante)를 잘 못 들은 거였다. ㅎㅎ... 찾았으니 다행이지 못 찾았으면 샤롯데 거리는 거 뭐냐고 여기저기 글 쓸 뻔했다...

 이 넘버는 곡 자체도 좋지만 안무와 의상도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엘렌과 엘렌이 나타샤를 위해 가져 온 의상은 드레스 허리춤에 망토처럼 가운데가 뚫려있는(?) 천이 한 겹 더 붙어있었는데 엘렌과 나타샤가 그 천을 양 손으로 붙잡고 노래에 맞춰 좌우로 흔든다. 그 흔들림이 너무너무 예뻤다. 옷 자체도 반짝거려서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옷을 가지고 안무를 하니까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었다. 이 장면만 몇 번이고 더 보고 싶었다. 엘렌은 매력적이고 나타샤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외에도 좋은 넘버들은 많았는데 장면까지 기억에 남는 건 Charming 뿐이라 이거만 적겠다. 작품을 많이 보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넘버에 꽂힌 적은 극히 드문데 원어 음원을 쉽게 구매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본 지 한 달도 더 넘었는데 맨날맨날 코멧 넘버 듣고 있다... ㅠㅠ 너무 좋다.

 배우들이 객석에 정말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얼른 코로나가 안정되고 코멧이 돌아와 더 재밌게 놀았으면 좋겠다. 그때도 보러 가야지... 그전에 얼른 <전쟁과 평화>를 읽어야겠다. 코멧은 책에 나오는 가문중 하나를 뽑아서 만든 거라 분량은 거의 없겠지만 책 자체가 재밌다니까 한 번 속는 셈 치고 읽어봐야겠다. 밀린 책이 많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목표를 세워두면 언젠간 읽겠지..!!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온다면, 나도 책을 빨리 읽어보도록 하겠다.